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졸업전시를 앞두고 졸업 후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군대시절을 포함한 10년 학생신분을 더는 경제적 사정상 유지할 수가 없었으며 실무 경험 없이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앞뒤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취직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후 2년 반정도 디자인 에이젼시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디자이너들에게는 디자인 에이젼시에서 근무하는 것이 어떻게 생각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저로서는 반복되는 일상과 경쟁 프리젠테이션과 같은 긴박한 프로젝트 진행에 상당히 지쳐 있었습니다.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디자이너들에게 주기적으로 2년차와 4년차 생활이 끝나갈 즈음에 고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프리젠테이션 준비에 밤 세기는 일수였고 주말 또한 반납해야 했던 저에게도 2년 후에 그 고비의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름 공을 들인 시안들의 교정지와 결과물들을 보는 순간은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피로에 대한 충분한 위안이 되었고, 편집자와 사진작가 그리고 내부 디자이너와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일에 대한 상당한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제 마음 어느 한구석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반복적인 일상의 지루함, 디자인 에이젼시라는 조직의 비효율성에서 오는 불만들, 결코 낳아질 것 같지 않은 클라이언트들의 거만한 태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일의 '목적성'에 대해 강한 의구심 등등의 종합적인 것들의 총체에서 기인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유학 길을 선택한 것이 무모한 시도로 끝이 나버릴 수도 있었고 너무나도 막연했지만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모험적 대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프로그램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십시오.
예일대의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은 석사학위를 위한 2년 과정입니다. 기본적으로 1학년 때는 여러 가지 미디어(모션 그래픽, 책과 포스터, PHP등)를 이용하여 다양한 실험과 표현방법으로 본인만의 새로운 비쥬얼 언어를 찾는 과정입니다. 2학년 때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습득한 관심과 주제를 바탕으로 논문 주제로 발전시켜 더욱 깊이 연구하고 실험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졸업논문을 통해 학생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떻게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는지 그리고 어떠한 실험을 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한국의 논문은 기존에 발표된 여러 연구 성과와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분류, 통계,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이론화하는 과정인데 반해, 이곳의 논문은 2년 동안 학생이 진행해온 작품에 관한 보고서 형식의 작품집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논문 제작 시 정해진 포멧도 없으며 학생의 자유로운 표현 방법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때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틀 속에서 다양성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방문하여 학생 개개인에 대한 꼼꼼하고 세심한 비평 하고 학생은 그들로부터 다양한 의견과 조언을 듣고 디자인의 방향성을 잡게 됩니다. 다양한 분야 디자이너들의 비평이기에 때론 의견 충돌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런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학생에게 달렸습니다. 외부 디자이너와의 만남은 학기중 2주간의 워크샵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학기 말 최종 리뷰 때 학생들의 작품 평가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유학생활에서 얻게 된 점은 무엇이며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지요?
워낙 다양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문제해결 방법도 천차만별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교수들과 외부 강사들이 모여 함께 학생들 작품을 평가하게 되는데 그에 앞서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이때 학생들의 작품 설명을 듣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때론 그들의 아이디어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새롭지 않아 쓴소리를 듣기도 합니다만, 대화를 통해서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해 갑니다. 이런 천차만별의 다양한 학생과 같이 생활하다 보면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며 배우게 됩니다. 물론 교수와 강사로부터 얻는 부분도 상당히 크지만, 학생의 다양한 생각과 시각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교수와 강사의 학생 작품에 대한 비평의 태도가 한국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학생이 강사와 동등한 발언권을 갖게 되며 보는 이들의 솔직한 느낌을 공유하게 됩니다. 수업을 듣는 인원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학생을 가르친다는 느낌보다는 대화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한국의 디자인 교육이 많은 부분 개선이 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일방적이고 결과위주의 주입적 방식에서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곳은 대학원 과정이기 때문에 학생을 뽑을 때 실무 경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진행되는 수업방식은 상업적 디자인의 문제해결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므로 학생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해왔던 디자인 문제해결 방식과의 다름을 느끼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혼란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 또한 새로운 과제를 줬을 때 저도 모르게 실무 경험을 통해 배워온 익숙한 디자인스타일과 문제해결 방법들을 다시 꺼내게 되었고 그것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 한계를 실감해야 했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으려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스타일을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쫒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반성의 시간도 포함된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방법론에서 한국에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그것의 한계의 선을 그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한계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불확실성의 두려움과 자신감의 부재가 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되돌아 보면 대학 시절은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 스타일만 모방하기에 바빴고, 입사 후엔 낯설게 느껴졌던 크라이언트를 위한 디자인 솔루션을 이해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 저에게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 동기를 찾지 못한 채 떠다니는 너무나도 막연한 대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제가 얻게 된 것은 제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자문해 보고 넘지 못했던 그 한계의 선 너머에 있는 호기심영역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상당히 뻔한 이야기 같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본인의 관심사를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고 말하고 싶네요. 꼭 디자인과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디자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이었으면 합니다. 어떤 특정한 학문 분야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으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관심과 재미있는 부분들의 세심한 관찰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형미와 감각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경험과 관찰로부터 그 컨텐츠를 이끌어 낼 때 더욱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대학생이란 신분이야말로 무한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공모전도 좋고 아르바이트도 좋지만,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재미있는 것, 관심 있는 것을 찾아보고 실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그래픽디자인 역사와 예술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흐름을 알 수가 없고 미래를 예측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역사인식은 현재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듯이 자기 작품을 바라볼 때 비평적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기준이 생기며, 나아가 디자인 동향을 재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디자이너 역할의 영역이 갈수록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디자이너의 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담론들이 형성되어가고 있기에 디자이너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영역이 편집자뿐만 아니라 비평가의 몫까지 확장해가고 있다고 봅니다. 모니터 앞에서 늦은 밤까지 일하는 운동할 시간도 없는 디자이너들이지만 그들에게 잠시 모니터에서 떨어져 책을 읽고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를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집행위와 기록 습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수집행위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한다기보다도 사물을 관찰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무궁무진한 유형, 무형의 정보들이 쏟아져나오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홍수와 같은 정보들 속 수집행위 과정에서 선택의 기준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 기준들이 직관적이든 경험적이든, 선택된 것들의 무리로부터 파생된 맥락 속에서 디자이너는 새로운 의미와 재미를 찾게 되기 때문에 수집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디자이너의 기록 습관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다양합니다. 그것들이 글이 되든 그림이든 직관적인 습작들의 자유로운 표현들은 당장에야 아무 쓸모없는 것들로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큰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글은 2008 단국대학교 학과소개 책자에 들어갈 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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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많은 것 느끼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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